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창시자 - 헨리 기센비어

    • 미국 Jaycee전쟁기념본부 전시관에는 헨리 기센비어의 청동 흉상이 세워져 있다.
    • 높이 2피트의 이 구리 흉상은 “헨리 기센비어”라는 인물에 비하면 작은 기념품에 불과하다.
    • 그는 인내심이 대단한 인물로 불가능에 도전하여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야망이 강했다.
    • 기센비어의 야망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은 그러므로 이기심이 아닌 타인과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그의 굳은 결심 때문이다.
    • 그의 꿈은 타인을 위한 봉사에 있었다. 그의 계획은 많은 젊은이들이 지역사회의 현안문제에 참여하고 대중을 위해 헌신하게끔 하는 것이었다.
    • 그의 이러한 전망은 오직 Jaycee라고 하는 세계적인 단체를 통해 현실화 되었다.
  • 헨리 기센비어는 1892년 7월 26일 기센비어 집안의 6남매 중 한 사람으로 태어나 미조리주 센 루이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. 그의 부친은 엄격하면서도 친절한 독일인 이민자였고, 그의 모친은 유순하고 정이 두터워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.

  • 기센비어 가족은 1990년 초 센 루이스의 평범한 중산층 집안들 중의 하나였다. 비록 빈곤에 허덕일 정도는 아니었으나 헨리는 매우 어렸을 적부터 일을 배웠다.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헨리는 일찍이 현실에 눈을 떠 사회생활에 뛰어든 것이다.

  • 1909년 기센비어는 은행가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고, 그 후 은행은 그의 영원한 직장이 되었다. 처음 몇 년 동안은 은행업무를 배우기 위해 무수한 열정을 쏟았다. 장부정리나 그밖의 업무를 공부하기 위해 그가 은행에서 밤을 세운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.

  • 그의 나이 18세가 되던 1910년 그는 허큘라네움댄스 크럽을 차렸다. 사교를 목적으로 설립된 이 크럽은 뒷날 청년진보시민연합(YMPCA)의 기초(基礎)가 된 것이다. 이때가 1915년.Jaycee의 전신인 이 단체는 단지 댄스크럽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젊은이들의 공민과 지역문제 참여라고 하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. 이 단체는 그 후 “Junior Citizens”로 이름을 바꾸었고 (JC’s하는 약자는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.),1918년 센 루이스 상업회의소와 연합한 이후 그 명칭이 지금의 청년산업회의소(Junior Chamber of Commerce)로 변경된 것이다.

  • Jaycees창설자의 타인을 위한 봉사는 그 단체 밖에서h 이루어 졌다. 애국심이 남달랐던 그는 일차 세계대전에 참가해 2년동안 육국 하사관으로 복무하였다. 고향으로 보내진 그의 편지에는 당시의 전시상황이 자세히 적혀있다. 포탄투하가 시작되던 어느 날 그는 참호 속에서 커버를 씌우고 있는 한 병사를 지나치게 되었다. 그때 그 병사는 기센비어에게 같이 참호 속으로 피하자고 사정했다. 그러나 기센비어는 뭔가가 자신을 계속 끌어당기고 있다고 말하고 전진을 계속했다. 그리고 나서 몇 분후 그 참호는 직격탄을 맞고야 말았던 것이다. 결국 기센비어의 고집은 그의 생명을 구한 셈이다.

  • 제대 이후 그는 다시 전격적으로 Jaycees 활동에 관여했다. 1920년 여름, 제1회 내셔널 컨벤션에서 이 단체의 공식 명칭이 미국청년회의소로 확정지어 졌으며, 기센비어는 이때 제1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. 그는 미국 Jaycees에 대한 그의 전망을 이렇게 피력했다.“...이제 이 위대한 단체의 운명은 바로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.
  • Jaycees에 대한 국민의 인식도를 전국적으로 확산 시키고, 위대한 미국을 건설하기 위한 젊은이들의 요구와 관심을 수렴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.”

  • 기센비어는 Jaycees 뿐만 아니라 다른 단체나 크럽에도 가담하여 그의 리더쉽을 발휘 하였다.그는 광고 크럽을 운영하는 등 특히 대중 감화 연설에 커다란 열정을 보였다. 기센비어의 성공은 단지 이들 단체활동에 머무르지 않았으며, 그는 또한 뛰어난 금융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. (그의 이러한 성공가도는 당시의 젊은이들로써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.)

  • 헨리 기센비어는 그러나 항상 병고가 끊이질 않았으며 1930년에 들어 그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다. 그 후 몇 차례의 수술을 받고 다시 그의 활동이 재계되는 듯 했으나, 1933년 은행불법거래 및 자금처리과실 문제에 연루되어 사실상 그의 활동은 중단되었다.

  • 지금까지 대중봉사를 위해 헌신해 왔던 한 사람으로서 그 사건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. 결국 사건의 원인은 경제공항으로 빚어진 자연손실이라는 것이 밝혀져 그 소송은 중도 기각되었다. 비록 그의 혐의가 완전히 풀리고 명예도 회복되었으나, 그 사건은 마치 검은 구름처럼 그의 인생을 뒤덮고 있었다.
  • 법원 청문회가 끝나고 일 년 이채 못되어 그는 신장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. 이때가 1925년 11월 7일, 미국 Jaycees의 또 다른 선구자인 존암부르스터는 이렇게 그를 기렸다. “그는 영광이 무엇이고, 또한 역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. 그러나 그는 그 둘을 똑같이 취급했다. 그는 영광에 안주하지도 않았고 역경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. 그의 인생은 그가 아무리 험난한 기을 가고 있더라고 분개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그런 삶이었다.”

  • 기념관에 세워진 그 동상은 헨리 기센비어라는 위대한 인물을 상징하는 하나의 작은 조감품에 불과하다. 그의 인품과 정신은 Jaycees를 통하여 영원히 반영(反映)될 것이다.